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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달비

http://poemmusic.net/technote6/board.php?board=poem2&command=body&no=4542025년 3월 1주 / 좋은 시 선정 / 작달비 / 정대수작달비 / 정대수 하늘 저 멀리서바위 굴리는 소리를 내던 바람이 구름을 떼로 몰고 와온 천지를 어둠에 가두고비를 쏟아붓기 시작한다 검푸른 산도 강 건너 물끄러미 보이던 마을도달아난 듯 모습을 감추고온통 회색뿐인데 세찬 빗줄기에 요동치던 나무는망설거릴 여유조차 없이휘어지고 꺾여 휩쓸리다가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바람이 앞서 달리는 막다른 길목에서 처참한 몰골로 멈춰 섰다 서둘러 울던 매미는 숨을 죽이고까마귀는 어디에 숨어저리도 악다구니를 쓰며 호통칠까 무궁화 꽃이 필 무렵작달비에 갇혀 꼼짝을 못 하고바람이 구름과 화해를 하..

냉기와 온기

냉기와 온기 / 정대수 불타는 여름에는 겨울이 좋단다살을 에는 겨울에는 그 여름이 좋단다어쩌면 이렇게 오락가락하며 사는 것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한들다시 그리워질 지난 모습들임에도마치 전혀 몰랐던 이방인처럼 외면하기를 반복하는물과 불의 맞대결접점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양극의 대립으로땅이 갈라지며 얼어붙게 만드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름 모를 이들의 손이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맹렬한 위기 속으로 뛰어들었다가바람처럼 홀연히 떠난 자리에는냉기로 싸였던 사방은 온기로 퍼지며결코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뿌리쳤던 손을 소리 없이 맞잡는 숨 막히는 여운에보이지 않았던 벽이 무너지는 찰나의 시간은모두가 꿈꾸는 밝은 세상을꿈처럼 눈앞에 펼쳐 놓는다.

도화지

도화지 / 정대수 온갖 색칠을 하며 그려온 여러 가지 그림을모두 잊어버리고다시 그림을 그리라는 듯새해를 맞아 하늘은하얀 도화지를 펼쳐 놓았다그렇다면 무엇을 그릴까무엇을 그려야 할까 대들보가 흔들리며 사방이 아우성이고급작스럽게 날아든 첫날의 비보에 놀라움과 슬픔은일순간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는데눈물이 마르기도 전에다시 그림을 그리기에는 햇살도 내키지 않는지일찌감치 빛을 거둬들인 다음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심정으로버티고 있던소한 날하늘은 가만히 하얀 도화지를 펼쳐 놓는다 그럼에도 다시 그 무엇을 그려야 한다기에무엇을 그려야 할지 막막하지만이제는 지워야만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묵은 번데기에서 빠져나와다시 그려야 할 그림을 구상하며흔들리는 다리를 일으켜 세워뽀드득뽀드득하얀 도화지 위를 아슬아슬 걷는다.

꽃잎

꽃잎 / 정대수 눈이 내리듯 바람에 흩날리다가나비처럼 자유롭게 나부끼는 꽃잎내가 앉은 자리를 곱게 수놓으며모였다 흩어졌다 한다한잎 두잎 손톱만 한 꽃잎들로먼저 꽃잎이라는 글자를 만들며꽃잎처럼 부드럽게 살아가자멋쩍은 다짐을 해보다가이어서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만들며성깃해진 지난 기억들을살며시 들추어보기도 하면서계면쩍게 웃다가사랑만큼이나 어렵사리 만들어진 하트는나를 사랑해 주고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숨겨놓은 마음을 담아 바람에 실어 보낸다무거운 마음을 다독이는 글씨와 그림은그늘에 갇힌 날 선 도끼눈을 부드럽게 하고순결함으로 세상을 보게 하며굳어버린 얼굴에 미소를 찾아주어가만히 꽃잎을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긴다.

갈무리

갈무리 / 정대수 발자국 소리 벗 삼아 하얀 눈길을 걸으면 새로운 세상을 걷는 신선함이 있다 눈 덮인 산 들머리에 들어서면 모두가 잠시 숨을 죽이는 듯 정적이 감도는데 숯등걸 같은 속내 걸머지고 아슴아슴 산 중턱에 올라 뜨거운 입김 토해내며 발아래 세상을 말없이 호령하면서 마치 준비된 자리인 양 사방이 하얀 눈밭에 앉으면 부릅떴던 눈도 검게 그을렸던 마음도 하얗게 정갈해진다 켜켜이 쌓인 눈 휘어진 나뭇가지에 실린 무게도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받아 소리 없이 녹아내리듯 명멸하는 시간 애써 붙잡고 거듭나기를 안간힘 쓰는 중에 소반하게 다잡는 각오 눈밭에 새기며 또 한 해를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