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지 / 정대수
온갖 색칠을 하며 그려온 여러 가지 그림을
모두 잊어버리고
다시 그림을 그리라는 듯
새해를 맞아 하늘은
하얀 도화지를 펼쳐 놓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그릴까
무엇을 그려야 할까
대들보가 흔들리며 사방이 아우성이고
급작스럽게 날아든 첫날의 비보에 놀라움과 슬픔은
일순간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는데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다시 그림을 그리기에는
햇살도 내키지 않는지
일찌감치 빛을 거둬들인 다음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심정으로
버티고 있던
소한 날
하늘은 가만히 하얀 도화지를 펼쳐 놓는다
그럼에도 다시 그 무엇을 그려야 한다기에
무엇을 그려야 할지 막막하지만
이제는 지워야만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묵은 번데기에서 빠져나와
다시 그려야 할 그림을 구상하며
흔들리는 다리를 일으켜 세워
뽀드득뽀드득
하얀 도화지 위를 아슬아슬 걷는다.